New Bara's Blog/Complaint

책은 당신이 아니다.

bhbara 2012. 9. 23. 01:49



 "저기, 그 책 재미있니?"



 그녀는 말이 없이 거의 다 읽은 책장의 한 쪽을 넘기며 나를 슬쩍 쳐다본다.  맞다. 이 아이는 한 번 책을 펼치면 도중에 놓는 법이 없었다. 무척 뜨거웠던 여름 바다에 놀러갔을 때도 그 아이의 손에는 책이 들려 있었다. 사실 무슨 책이 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, 그 책이 기억이 안난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다. 왜냐면, 나도 읽었었거든. 그 책을. 내가 잠을 자는 동안 그 아이는 책을 읽느라 잠을 안자고, 내가 일어날 때 그 아이는 책을 다 읽고 잠이 든다. 덩그러니 남겨진 그 공간에 뭔가 지루함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그 책 뿐이었다.


 사실 그녀가 읽은 책을 내가 스스로 찾아서 읽을 필요가 없었다. 물론 처음에는 그녀의 관심사와 그녀의 지향점, 혹은 그녀의 취향을 알기 위해 곁눈질로 책의 제목을 외우고 서점에 가서 읽었었다. 그리고 곧 내가 읽지 않아도 한동안 그녀가 그 책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난 책을 거의 읽지 않게 됐다. 그만큼 자세하고 폭 넓게 책을 읽어주는 여자는 이 아이가 유일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. 그리고 그 책에 관한 그녀의 생각의 벽은 너무도 높고 단단해서 "난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" 라던가 "나도 읽어봤었는데" 라는 표현을 무척 싫어했다. 그냥 끝까지, 그 것이 10분이 됐든 10시간이 됐든, 듣고 있어야 했는데 혹시라도 읽은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마치 영화를 먼저 보고 다시 볼 때의 그 지루함의 몇 배는 더 심한 지루함을 느낀 후로 그저 간단한 한 페이지 요약 정도만 훑어보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. 누군가에게 어떠한 이야기를 들을 때 딱 한페이지 정도의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상대방이 무척 즐거워한다는 사실을 바로 이 때 알게 됐다.


 

 그러다 어느 날 무척 치명적인 문제를 발견하게 됐다. 일단 그녀의 취향과 지향점, 그리고 관심사 등등 모든 것이 그 책들 안에 요약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. 과연 그 것은 그녀의 순수한 모습일까. 혹은 작가들의 생각에 감명받아 그냥 그렇게 되고 싶은 욕망인 것일까. 이런 의문점을 갖게 된 후로 점점 그녀의 모든 말들 뒤에 수많은 다른 이, 즉 작가들이 서있는 느낌을 받게 됐다. 그녀가 가장 크게 화를 냈던 나의 발언 중 하나가 바로 이 것이다.



"그건 너의 원래 모습이 아니잖아."



 그리고 한 달은 넘게 싹싹 빌었던 적이 있었다. 하지만 정말 그 건 그냥 형식적으로 용서를 구한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. 왜냐면 난 절대 그런 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, 그녀는 헤르만 헤세를 싫어해서 사람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는 데미안의 서문의 그 내용을 정말 싫어했었기 때문에 그녀가 가장 원하는 답변은 "그래, 내가 잘 못 생각했어. 생각을 쭉 해봤더니 너의 생각이 이해가 되더라. 내가 미안했어." 라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.



 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기억한다. 그녀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말해보라고 하면 도무지 모르겠다고 대답했었다. 꼭 이유를 대라고 누군가가 강요를 하면 그저 멋쩍게 웃으면서 "아름다우니까." 라고 대답을 하곤 했다. "겨우 그거야?" 라고 이야기 하면 난 이 말을 했었다. 



 "모든 것이 다 아름답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,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몰라?" 



 내가 말한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 설명할 길이 없다. 그냥 아름다운 것. 그 자체니까. 하지만 점점, 책에 물들어간다고 표현했던 그녀의 변화가 왠지 모르게 무척 신경이 쓰였다.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모습이 그녀의 모습에 덧대어진다는 것. 아마 그 것을 싫어했던 것이라 생각한다. 뭐 사실 그렇게 되더라도 상관은 없었다. 말 그대로 그런 모습까지 "그냥" 사랑하면 되니까. 사랑하면서 모든 것이 다 충족 되는 경우는 절대 없으니까. 하지만 나를 가장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바로 그런 책의 내용들을 나에게 강요를 하는 것이었다.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없는 아주 작은 자신의 결점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헤어나올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깊은 수렁에 빠지는 그 감성이 무척 버거웠다. 



 "이봐, 책에 나온 것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거나 그 것이 자신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선 일단 책이라는 것을 순수하게 참고 사항이라고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지 않을까?" 



 하지만 이런 말을 하기엔 그녀에게 그 작가들은 정말 너무도 위대했고, 도저히 들어갈 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을 때 즈음 그녀가 그런 감성에 빠질 때 말 없이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. 할 말이 없는 백지상태. 곧, 헤어지겠구나 라는 예감이 확신으로 바뀐 그 순간.